편집장 김춘산
【서론 : 신라의 하늘 아래 공존했던 또 다른 신앙】
한반도 기독교 역사를 논할 때 흔히 19세기 근대 선교사들의 입국을 그 기점으로 삼곤 하지만, 이는 우리 역사가 품고 있는 광활한 영적 스펙트럼의 일부분만을 보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통일신라 시대는 불교의 황금기였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를 통해 유입된 동방 기독교의 일파인 ‘경교(Nestorianism)’가 신라 사회의 일원으로서 공존하며 독자적인 흔적을 남겼던 역동적인 시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제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돌십자가'와 '성모자상'을 통해, 오래 전 이 땅에 머물렀던 복음의 구체적인 지문들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1. 경교(景敎)의 전래와 당나라와의 교류 맥락
신라 시대의 기독교 흔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먼저 살펴야 한다. 7세기에서 9세기에 이르는 당나라는 전 세계의 문물이 모여드는 이른바 '국제 도시'였다.
당시 당나라 태종 시대에 페르시아를 거쳐 들어온 '경교'는 '광명 정대한 종교'라는 뜻의 '경교(Nestorianism)'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대진사(大秦寺)라는 사찰을 세울 정도로 융성했다. 아울러 당시 신라는 당나라와 혈맹 관계를 맺고 활발한 인적·물적 교류를 가졌다.
신라의 유학생, 승려, 상인들이 '장안'(당의 수도)에 머물며 경교의 문화를 접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또한 당나라에 세워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는 당시 경교의 교리와 전래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에 신라 출신 인물이 관여했거나 이를 접한 신라인들이 복음의 씨앗을 품고 귀국했을 것이라는 가설은 역사적 개연성이 충분하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신라의 중심지인 경주에 기독교적 유물이 남겨진 것은 결코 우연의 일이 아니다.
(출처 : 경교(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66380&cid=46647&categoryId=46647)
(출처 : 開元 16년(A.D.728; 新羅 聖德王 27)에(한국 고대 사료 DB)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jo_014r_0010_0030_0130)
2. 불국사 돌십자가 : 불교의 성지에서 발견된 복음의 증거
신라 기독교 전래설의 중요한 물리적 증거는 1956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돌십자가'이다.
불교의 우주관을 형상화한 사찰인 불국사에서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돌십자가는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형태를 정밀하게 분석해 보면 동방 기독교인 '네스토리우스교'의 독특한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십자가의 네 끝이 둥글게 처리된 문양은 중앙아시아와 당나라에서 발견되는 '경교' 십자가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출처 : 경교 돌십자가(디지털동작문화대전), https://www.grandculture.net/dongjak/dir/GC08200451)
이 유물이 불국사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당시 신라의 종교적 관용도를 보여준다 할 수 있다. 불교가 국가의 통치 이념이자 주류 신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역에서 온 새로운 사상과 신앙이 배척 당하지 않고 문화의 일부로 스며들었음을 시사한다.
누군가는 이 십자가를 몸에 지니거나 처소에 두며 부활의 소망을 키웠을 것이며, 그 영적 흔적이 천년을 버티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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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의 돌 십자가(출처 : 교회공간연구소) | 경주 근교에서 출토된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상 (출처 : 153네트 선교회) |
3. 성모자상과 마리아상 : 불교 예술 속의 기독교적 투영
'돌십자가'와 더불어 경주 근교에서 출토된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상' 역시 기독교적 사료로서 매우 중요한 흔적이다.
불교의 관음보살상과는 그 형태와 구도가 확연히 차이 나는 이 조각상은, 한눈에 봐도 가톨릭이나 경교에서 공경하는 성모자상을 연상시킨다.
물론 이를 '송자관음(자식을 점지해 주는 관음)'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조각된 인물의 복식이나 아이를 안는 방식, 그리고 인물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성스러운 분위기는 중동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전래된 성모상의 '도상학적' 특징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만약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경교'의 성모 공경 문화가 신라에 유입되었다면, 신라의 예술가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불교적 조각 기법을 빌려 기독교의 성스러운 인물을 표현했을 것이다.
이는 종교 간의 갈등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이 예술이라는 그릇을 통해 어떻게 융합되고 토착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이다.
우리가 이 유물을 '성모자상'으로 부르기를 주저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내면의 아집 때문일지도 모른다.
4. 경주 고분 유물과 서역의 숨결
경주의 수많은 고분에서 발견되는 '유리그릇(로만 글라스)'과 '황금 보검', 그리고 '괘릉'의 '무인 석상' 등은 신라가 로마 및 페르시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증명한다.
특히 '괘릉'의 '무인 석상'은 그 외모가 전형적인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신라 왕실이 서역 출신 인물들을 등용했거나 그들과 깊은 관계를 맺었음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국제적인 환경 속에서 '경교'의 선교사나 신자들이 신라에 머물며 공동체를 형성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언어학적으로도 신라어의 일부 단어나 고대 지명 속에 기독교적 배경을 암시하는 흔적들이 남아 있다는 연구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흔적들은 경주라는 도시가 단순한 불교 도시가 아니라,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이 만나는 거대한 용광로였음을 웅변하고 있다.
【결론 : 부활의 신앙으로 잇는 역사의 맥락】
우리는 왜 이토록 신라 시대의 기독교 흔적에 주목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결코 서구 지향적인 외래 종교가 아니라, 이미 오래 전 우리 조상들의 삶과 호흡 속에 녹아들어 있었던 '우리내 삶'이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이나 일부 교인들이 '이단적 요소'를 우려하며 '경교'의 흔적을 무시하거나 터부시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행하신 거대한 섭리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파티마'의 성모 발현과 같은 놀라운 기적들이 전 세계적으로 보고되고 있고 교황청이 이를 공인하였듯이 이미 신라 땅에서 발견된 '돌십자가'와 '성모자상'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하여야하지 않을까?
결국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열린 마음과 겸손함이다.
개신교인이든 천주교인이든, 혹은 종교가 없는 이들이든 상관없이 오래 전 신라의 하늘 아래 십자가를 긋고 부활을 꿈꿨을 누군가의 믿음을 존중해야만 한다.
우리가 훗날 하늘나라에 가서 부활의 영광 속에 그 신라의 신앙인들을 만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인사를 건네야만 할까?
아집(我執)을 내려놓고 경주 불국사의 '돌십자가'를 바라보자!
그리고 그 돌덩이 속에 흐르는 뜨거운 복음의 박동을 한번 느껴보자!
19세기 선교사들보다 훨씬 앞서 이 땅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할 때, 우리의 신앙은 비로소 반쪽짜리 역사를 넘어 온전한 진실 위에 서게 될 것이다.
신라의 '십자가'는 오늘날 우리에게 묻고 있다.
"너희는 너희의 교리에 갇혀 있는가? 아니면 온 세상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무궁한 역사를 보고 있는 것인가?"
그 물음에 이제는 우리가 진실하게 답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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